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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유용해도되? 사이번달 궁금증! 혁신그자체! 구상나무 보면놀랄걸?실 나만알고싶어요. 김방경 ㅋㅋ

by kd3stkd588tb 2020. 10. 17.

반가워요:-)마리꾸 이에요.이번에도 제 BLOG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밖이 맑은게 너무 만족해요.언니오빠들은 오늘 무엇을 하며 보내셨나요? ^^바로 얘기할 토픽은이에요.마음의 준비 되었으면 남들보다 빠르게 시작하쥬. 가봅시다 !

그나저나 사실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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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라산, 지리산, 덕유산 )

이번포스팅은 구상나무 에 관련하여 알아보았는데요.구상나무 열매도움이 좀 되셨나

요?그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래요.이상 구상나무 (무주) 마리크 이었습니다.씨유레이러~여기까지

하이용^^먀리크 이에요.오늘도 이렇게 마이 BLOG를 놀러와주셔서 감사해용.!!하늘이 깨끗한게 너무 즐거워요.이웃님들~ 오늘은 무엇 하며 보냇나요? !여기서 논의할 토픽은이에요.마음의 준비 되셨으면 남들보다 빠르게 달려나갑니다. 가즈아 :ㅇ

t-align: center;"> 맞다!! 사실저도 #김방경 #김방경 (안동) #김방경 (제주) 를 매번 궁금했는데요.여러분들 검색에 저도 이러케 알아냈어요!그러믄 바로 고고씽해볼까요?잇님들의 행복에 보답하는의미로자, 시작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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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맨날 생각하는거긴한데 포스팅하면서 매우 새로운 내용을 공부하는것 같아요.잇님들은 느낌은 어떠세요?현재, 이슈가 엄청 치솟는 관심사 중에서많은 분들이 문의하시는게 바로바로바로 김방경입니당응?이라고 생각하실 수있기도하지만 통상적으로 많이 문의하시는 내용이에요쾌적한 바람을 맞으면 인터넷을 감상할 수 있는 감사한시간 이웃님들의 불편함이 안생기도록 화이팅할게요매번이지 느끼지만 맛있는 음식 배불리 먹고 행복한 여기에서 블로깅 하는것이 너무나도 행복이에요.요기 마리끄 블로그에서 높은 품질의 포스트 공부하고가세요

-align: center;"> 김방경(金方慶)1)은 자가 본연(本然)이며 안동(安東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사람으로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먼 자손입니다.
부친 김효인(金孝印)2)은 성격이 근엄하고 굳센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글씨를 잘 썼으며 과거에 급제3)한 후 벼슬이 병부상서·한림학사에 이르렀다.
김방경의 모친이 임신하였을 때 여러 차례 구름과 노을을 먹는 꿈을 꾸고는 다른 사람더러 “구름 기운이 항상 내 입과 코에 서려 있으니 아이가 반드시 신선 세계에서 내려 올 것입니다.
”고 예언했습니다.
태어나자 조부 김민성(金敏成)의 집에서 양육되었는데 조금만 성이 나도 반드시 길거리에 드러누워 울곤 했지만 소와 말이 그를 피해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고종 때 나이 열여섯에 음서(蔭敍)로 산원(散員) 겸 식목녹사(式目錄事)에 임명되었다.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아껴 정중히 예우하고 큰 일이 있으면 모두 그에게 맡겼다.
거듭 승진해 감찰어사가 되자 우창(右倉)을 관리했는데, 어떤 청탁도 용납하지 않자 한 재상이 권신(權臣)에게 “지금의 어사(御史)는 지난번의 어사보다 왕실의 물자공급을 제대로 못합니다.
”고 불평했습니다.
마침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이 꾸짖자,“지난번의 어사처럼 하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라의 창고를 채워두는 일이 중요합니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들의 구미를 다 맞출 수는 없습니다.
”고 대꾸하니 불평했던 자가 크게 부끄러워했고 권신도 안색이 변했습니다.
뒤에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 몽고군의 침공을 당하자 여러 성의 사람들이 위도(葦島)4)로 들어가서 방어했습니다.
섬에는 10여 리쯤 되는 경작이 가능한 평지가 있었지만 조수의 피해를 우려해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김방경이 둑을 쌓고5) 파종하게 하자 백성들이 처음에는 고통으로 여겼으나 가을에 곡식을 많이 수확해 그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섬에는 또한 우물이 없어서 항상 육지까지 물을 길으러 가야했는데 그 때 적의 포로가 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김방경이 빗물을 모아 두는 저수지를 만들자 그 걱정거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내직으로 들어와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는데, 당시 금위군의 장교들이 다투어 권세가에 빌붙는 바람에 경호가 매우 느슨해져 있었습니다.
김방경은 그런 상황에 분개한 나머지 몸이 아파도 휴가를 청원하지 않았습니다.
숙직소(宿直所)가 비좁은지라 금위의 장교들이 모두 궐 밖에 마련한 임시숙소에서 묵고 있었는데, 동료인 박아무개라는 자가 창기를 불러들이려 했으나 김방경이 굳이 말리자 박이 부끄러워하며 사과했습니다.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승진해서는 법대로 공정하게 임무를 수행했으며 늠름하게 위엄과 절조를 지켰다.
원종 4년(1263)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당시 좌승선(左承宣) 유천우(兪千遇)가 오랫동안 정권을 잡아 사대부들이 모두 그에게 빌붙었다.
김방경이 그와 길에서 마주치자 말 위에 탄 채 읍만 했더니 유천우가 “나는 조삼(皂衫)6) 봉명(奉命)이라 3품 이하는 모두 길가로 물러서 예를 표하는데, 그대는 어찌 이같이 하는가?”고 꾸짖었다.
김방경이 “그대와 나는 모두 3품이고 같은 조삼 봉명이니 나는 그에 합당한 예를 표했을 따름입니다.
”라고 대들며 서로 오랫동안 옥신각신합니다가 김방경이 날이 벌써 저물었다며 지나가 버렸다.
유천우가 이 일로 깊이 감정을 품고, 그 후 벼슬을 구하는 김방경의 친척이 있으면 그때마다 방해했으나 김방경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뒤에 진도(珍島 :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정벌을 위해 전라도로 가서 군사를 뽑으면서 유천우의 전장(田莊)이 있는 장사현(長沙縣 :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부근에서는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상장군으로 있을 때 무슨 일로 중방(重房)의 한 장교를 장형에 처했는데, 반주(班主)7) 전빈(田份)이 그 일로 악감을 품고 권신(權臣)에게 고자질해 그를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시켰다.
김방경이 옛날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이때 서북(西北) 여러 성에서 그를 다시 보내 진무(鎭撫)하게 해 달라는 글을 올렸다.
그래서 남경으로 좌천된 지 불과 사흘 만에 다시 서북면병마사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내직으로 들어와 형부상서·추밀원부사가 되었다.
원종 10년(1269), 임연(林衍)이 왕을 폐위시켰다.
당시 세자가 원나라에서 귀국하던 길에 의주(義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에 이르러 변란의 소식을 듣자 원나라로 되돌아가 황제에게 알렸다.
원나라 세조(世朝)는 오토르부카[斡脫兒不花] 등을 보내 본국 조정의 신하들을 설득하도록 조치했는데, 그 일행이 원나라로 돌아갈 때 김방경이 표문을 휴대하고 함께 원나라로 갔다.
세자가 군대의 파견을 요청함에 따라 몽케두[蒙哥篤]가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려 하자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세자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만약 몽케두가 오랫동안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특별시)에 주둔하면서 뒤이어 올 대군(大軍)을 기다린다면, 이미 우리 명령을 거역했던 임연이 군량을 공급할 리가 없습니다.
세자는 응당 임연과 한 패가 아닌 사람과 동행해야 합니다.
”세자가 적당한 사람을 찾는데 곤란을 겪자 시중 이장용(李藏用) 등이, 김방경은 두 번이나 북계를 다스리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니 바로 최적임자라고 천거했습니다.
세자가 자기 뜻과 완전히 부합됩니다며 김방경에게 동행을 명하자 김방경은 이렇게 건의했습니다.
“원나라 군대가 서경에 이르러 만약 대동강(大同江)을 건넌다면 개경이 저절로 혼란에 빠져 변란이 생길까 우려됩니다.
절대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모두 옳은 말이라고 찬동한 후 황제에게 건의했더니 황제도 허락하고 조서를 내려 원나라 군사로서 대동강을 건너는 자는 벌을 내릴 것이라고 지시했습니다.
원나라 동경(東京)에 당도하자 원종이 이미 복위되어 원나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일행은 그대로 머물러 원종을 기다렸다.
당시 최탄(崔坦)과 한신(韓愼)이 반란8)을 일으켜 여러 성의 수령들을 살해했지만 박주(博州 :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 수령 강빈(姜份)과 연주(延州 :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군) 수령 권천(權闡)에게만은 예우를 다하며 “김방경 공의 덕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고 말했습니다.
강빈과 권천이 김방경의 매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 김방경이 몽케두와 함께 서경에 도착하자 부로(父老)들이 다투어 와서 음식을 대접하면서 “공께서 계셨다면 어찌 최탄과 한신이 그런 일을 벌였겠습니까?”라고 하소했고 최탄 등도 아침저녁으로 와서 문안했습니다.
최탄 등이 은밀히 빈틈을 타 몽고군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몽케두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면서 꾀었지만, 김방경은 늘 계책을 써서 저지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임연은 왕이 황제에게 고려의 사정을 보고해 원군을 데리고 돌아올까 염려한 나머지, 만약의 경우 대항하기 위해 지유(指諭) 지보대(知甫大)에게 야별초(夜別抄)를 거느리고 황주(黃州 : 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에 주둔하게 하고 신의군(神義軍)은 초도(椒島)에 주둔하게 하여 대비했습니다.
최탄과 한신 등이 그 전략을 탐지하고 몰래 배를 마련해 정예 군사를 집결시킨 다음 몽케두를 설득했습니다.
“임연 등이 귀관과 원나라 군사를 죽이고 제주(濟州 : 지금의 제주도)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9) 귀관께서 사냥나간다고 널리 알린 후 고려 군대의 이동상황을 살펴 서로 알려 주면서 우리들은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보음도(甫音島)와 말도(末島)로 진격하고 귀관께서는 군사를 지휘해 착량(窄梁)10)으로 가면 저들은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일 것입니다.
빨리 상황을 파악해 황제께 보고하면 개경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고 여자들과 진귀한 보물들은 모두 귀관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에 넘어간 몽케두가 좋아라 허락했습니다.
영원별장(寧遠別將) 오계부(吳繼夫)의 아들인 오득공(吳得公)은 최탄의 내상(內廂)11)으로 있었는데, 그 사실을 알고는 김방경에게 몰래 알렸다.
김방경이,“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하고 반문하자 오득공은, 못 믿겠다면 은밀하게 염탐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김방경이 몽케두가 묵고 있는 객관 문으로 갔더니 각 부대가 모두 집결해 있었고, 최탄과 한신 등은 회색이 만면했습니다.
몽케두가 김방경에게,“오랜 객지 생활에 무료하여 놀이삼아 사냥을 나가려고 하는데 공께서 동행하시겠소?”라고 물어왔다.
김방경이 어디로 사냥 나가느냐고 되묻자, 대동강을 건너서 황주와 봉주(鳳州 :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로 가서 초도로 들어갈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김방경이, 황제의 명령을 들었을 것인데 왜 강을 건너려고 하는지 묻자 몽케두는,“몽고 사람이 사냥을 일상사로 하는 것은 황제께서도 아시는 바인데, 당신이 왜 막는거요?”라고 대들었다.
김방경이,“내가 사냥을 막자는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외다.
사냥을 즐긴다면서 왜 꼭 그곳으로 가려는 거요?”하고 설득하자 몽케두는,“강을 건너는 것이 죄가 됩니다면 내가 홀로 그것을 감당하겠소.
”하며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김방경이,“내가 여기 있는데 귀관이 강을 건널 수 있을 것 같소? 만약 그렇게 하려거든 황제의 허락을 받아 오시오.
”라고 강경하게 말한 후 몰래 지보대 등을 설득해 군사를 퇴각시키게 하였습니다.
몽케두는 김방경의 충직함이 천성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더욱 크게 공경하고 중하게 대우했습니다.
그리고는,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자는 최탄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고 밝히기에 그것이 누구냐고 묻자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김방경은 그 이름을 비밀에 붙이고 다른 이에게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김방경의 노력 덕분에 참언이 원나라로 들어가지 않았고, 마침내 고려는 평안을 되찾았습니다.
그 해 여름에 삼별초(三別秒)가 반란을 일으켜 인민(人民)을 약탈한 후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갔다.
12) 왕은 참지정사(叅知政事) 신사전(申思佺)13)을 추토사(追討使)로 파견하고 또 김방경에게 군사 60여 명을 거느리고 몽고 송만호(宋萬戶) 등이 거느린 군사 1천여 명과 함께 추격해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바다 가운데에서 영흥도(靈興島 :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에 정박해 있는 적선을 발견하고 김방경이 공격하려 했으나 송만호가 겁을 내어 만류하는 사이 적은 달아나버렸다.
당시 남녀노소 1천여 명이 적으로부터 도망쳐 왔는데 송만호가 적과 같은 일당이라고 오해해 모조리 체포해 돌아갔다.
뒤에 행성(行省)에 귀환시켜 달라고 요청했으나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많았습니다.
적이 진도로 들어가서14) 웅거하며 고을들을 침탈하는데도 신사전은 적을 토벌할 생각조차 않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내가 이미 재상까지 올랐는데, 적을 쳐부숴서 공을 세운들 다시 무엇하겠는가?”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까지 갔다가 적이 육지로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 개경으로 급히 되돌아갔으며 전주부사(全州府事) 이삼(李杉)도 성을 버리고 피신했으므로 모두 파직시켰다.
김방경이 신사전 대신 몽고 원수(元帥) 아카이[阿海]와 함께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공격에 나섰다.
적이 나주를 포위했습니다가 군사를 나누어 전주를 공격하니 나주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과 의논하여 항복하려고 했지만 전주 사람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지체했습니다.
15) 김방경이 도중에 그 소식을 듣자 홀로 말을 타고 쉼 없이 남쪽으로 달려가 먼저 전주에 공문으로 모일(某日)에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전주로 들어갈 것이니 신속히 군량을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전주사람들이 그 공문을 나주에 돌리자 그 소문을 들은 적은 포위를 풀고 퇴각했으며 그 후로는 다시 침략해 오지 않았습니다.
김방경은 토적사(討賊使)인 상장군 변윤(邊胤)16)과 장군 조자일(曹子一)17)·공유(孔愉)18) 등이 적이 금성(錦城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도 구원하지 않았습니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섬으로 유배보내라고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들을 용서하고 관직만 삭탈하였는데, 공유는 환관(宦官)과 친한 사이라 삭직도 모면했습니다.
김방경이 아카이와 함께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해 진도를 마주보고 진을 쳤다.
적은 약탈해 온 함선(艦船)에 모두 괴수를 그려 넣어, 온 바다를 뒤덮은 함선들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면 마치 날아오르는 것처럼 움직여 그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싸울 때마다 적군은 먼저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돌진해 와, 여러 날을 서로 겨루었지만 승패를 가리기가 어려웠다.
이때 반남(潘南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사람 홍기(洪機)가 아카이에게 김방경과 공유 등이 적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습니다고 참소하자 아카이가 그들을 체포해 수감한 후 다루가치[達魯花赤]19)에게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에 다루가치가 김방경을 소환해 홍찬(洪贊) 등과 대질시키고 참지정사(叅知政事) 채정(蔡楨)을 그 대신 파견했습니다.
아카이가 김방경을 쇠사슬로 묶고 군사 50명을 시켜 개경으로 압송하게 하니20) 보는 사람은 모두 원통해 했고 슬피 우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루가치가 왕에게, 홍찬 등이 거짓말을 했으니 옥에 가두어야 합니다고 알리고는 김방경을 석방했습니다.
왕은 즉시 다루가치에게 요청해 김방경으로 하여금 다시 적을 토벌하게 한 후 상장군으로 임명하고 잘 위로해 보냈습니다.
김방경이 진도에 당도해 보니 적은 모두 배에 올라 깃발을 잔뜩 벌여두고 징과 북을 요란하게 쳐댔으며, 또 성 위에서도 북을 두드리고 고함을 치며 기세를 돋우고 있었습니다.
아카이[阿海]가 겁을 낸 나머지 배에서 내리더니 나주로 퇴각해 진을 치려했습니다.
그러나 김방경이,“원수께서 퇴각합니다면 약점을 드러내는 꼴 밖에 안 됩니다.
적이 승승장구해서 추격합니다면 누가 감히 그 예봉(銳鋒)을 당하겠소? 만약 황제께서 듣고 문책합니다면 장차 무어라고 대답할거요?”라고 꾸짖자 아카이가 감히 퇴각하지 못했습니다.
김방경이 홀로 군사를 지휘해 적을 공격하자 적은 전함(戰艦)으로 맞받아쳤다.
원나라 군사들이 모두 퇴각했지만 김방경은,“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오늘입니다!”하며 적중으로 돌입하자 적은 그를 에워싸고 마구 몰아갔다.
김방경의 군사들은 죽기로 싸웠으나 활과 돌이 다 떨어진데다가 모두 화살을 맞아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포위된 채 진도 해안까지 몰리어 오자 적군이 칼을 빼들고 배 안으로 뛰어 들어왔는데, 김천록(金天祿)이 짧은 창으로 그들을 찔렀다.
김방경이 일어나,“차라리 물고기에게 먹혀 죽지 어찌 적에게 죽을 수 있겠는가?”하며 바다에 투신하려 하자 위사(衛士) 허송연(許松延)과 허만지(許萬之) 등이 만류했습니다.
부상당한 군사들이 김방경이 위급한 것을 보고 함성을 지르면서 다시 일어나 용감히 싸웠고 김방경은 태연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군사를 지휘했습니다.
장군 양동무(楊東茂)가 몽충(蒙衝)21)을 타고 적선을 향해 돌격하자 적은 뿔뿔이 달아나 드디어 포위망은 무너져 버렸다.
김방경이, 장군 안세정(安世貞)과 공유 등이 구원하러 출동하지 않은 죄를 따져 참수형에 처하려 했지만 아카이가 만류했습니다.
이듬해 왕은 안세정과 공유 등의 직책을 삭탈했으며 또 아카이[阿海]가 위축되어 싸우려하지 않습니다고 황제에게 보고했습니다.
황제는 아카이를 파직하고 힌두[忻都]22)로 대신하게 했으며 이어 조서를 내려 홍찬 등을 처형하게 했습니다.
김방경은 힌두와 협력해 진도를 공격할 작전을 세웠다.
김방경과 힌두는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벽파정(碧波亭 :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부터, 영녕공(永寧公)23)의 아들 왕희(王熙)와 왕옹(王雍) 및 홍다구(洪茶丘)24)는 좌군을 거느리고 장항(獐項)으로부터, 대장군 김석(金錫)과 만호(萬戶) 고을마(高乙麽)는 우군을 거느리고 동면(東面)으로부터 진격했는데, 동원된 함선은 1백 척에 달했습니다.
적이 벽파정에 모여 중군을 막으려고 합니다가 홍다구가 먼저 상륙해 불을 지르고 협공하자 당황해 우왕좌왕합니다가 우군 쪽으로 몰려갔다.
우군이 겁을 내어 중군 쪽으로 가려 했으나 적은 배 두 척을 빼앗고 타고 있던 군사를 모두 죽였다.
앞서 관군이 수차례 적과 싸워 패배하자 적은 관군을 우습게보고 방어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관군이 분전하여 공격하자 적은 모두 처자를 버리고 달아났다.
적들이 포로로 했던 강도(江都)의 민간인 남녀와 진보(珍寶)·진도(珍島)의 주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몽고군의 포로가 되었다.
김방경은 적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추격해 남녀 1만여 명과 전함(戰艦) 수십 척을 노획하였고, 나머지 적들은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로 달아났다.
김방경은 진도에 들어가 쌀 4천 석과 각종 보물과 병장기를 노획해 모두 개경으로 실어 보내고 적에게 잡혀있던 양민들은 모두 생업으로 복귀하게 했습니다.
그가 개선하자 왕은 사자를 보내 교외에서 영접하고 전공을 기려 수태위(守太尉)·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올려 주었다.
적은 탐라로 들어가서 내성(內城)과 외성(外城)25)을 쌓은 후 험한 지형에 의지해 더욱 창궐했습니다.
때때로 육지까지 나와 노략질하면서 안남(安南 : 지금의 경기도 부천시)의 수령 공유까지 잡아가자26) 해안지역은 텅 비어버렸고 경기(京畿)까지 침범하는 바람에 도로가 막히기도 했습니다.
27) 왕은 심각히 걱정합니다가 원종 14년(1273)에 김방경을 행영 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삼아 탐라로 파견했습니다.
김방경은 군사를 재훈련시킨 후 수군 1만여 명을 집결시켜 힌두·홍다구와 함께 반남현(潘南縣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주둔했습니다.
출발 직전 각 도(道)에서 모여든 전함이 모두 풍랑에 심하게 요동하는 바람에 전라도(全羅道) 함선 160척만으로 추자도(楸子島 : 지금의 제주도 북제주군 추자면)에 머물면서 순풍을 기다렸다.
한밤중에 세찬 바람이 불어 방향을 분간도 못한 채 항해합니다가 날이 샐 무렵 벌써 탐라 근처까지 와 버렸다.
풍파가 마구 쳐 올라 오도 가도 못하게 되자 김방경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국가의 안위가 이번 정벌에 매여 있고 오늘의 성패는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가?”하며 탄식했습니다.
잠시 후 풍랑이 멎자 중군이 함덕포(咸德浦 : 지금의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면 함덕리)로부터 진군하니 적은 바위 사이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마구 날뛰고 함성을 지르면서 그들을 막았습니다.
김방경이 매섭게 소리를 지르며 함선들을 나란히 전진시키자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몸을 던져 적진으로 돌입했습니다.
군사들도 이 기세를 타고 다투어 돌격했으며 장군 나유(羅裕)는 정예병을 거느리고 뒤이어 와서 수많은 적군을 죽이고 사로잡았습니다.
좌군 전함(戰艦) 서른 척이 비양도(飛揚島 : 지금의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비양도)로부터 바로 적진(賊陣)을 공격해 들어가니 적은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자성(子城)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관군이 외성